수강생 실습기사

팬덤정치와 국회 개혁 (1기 김예랑)

2022-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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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덤정치와 국회 개혁


‘2+2=5’란 수식은, 조지 오웰의 거대 감시 사회를 그리는 디스토피아 소설 <1984>에 등장한다. 분명 ‘4’가 답이지만, ‘빅 브라더’로 불리는 절대 권력이 국가 기구를 이용해 반복적으로 ‘2+2=5’라고 선전하면 허위가 사실로 둔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5월 ‘검수완박’ 법안을 통과시킨 야당은 최근까지도 끊임없이 법안의 ‘정당성’을 설파했다. 하지만 국민들은 특정 정치인을 비호하기 위한 의도로 만들어진, 잘못된 내용의 법안을, 거대 정당의 의원들이 적극적으로 민주적 장치를 무력화시켜가며 통과시킨 광경을 전부 목도했다. 야당이 구가해온 ‘양치기 소년식 전술’이 이권만 챙기는 정치공학적 꼼수라는 사실을 중도층마저 인지하는 계기가 됐다. 이런 민심의 흐름에 힘입어, 우리 시민사회는 건강한 민주주의 작동을 마비시키는 팬덤 정치를 혁파하고 우리 정치 체질을 정상화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그간 팬덤 정치는 우리 정치의 폐습인 ‘이권 땅따먹기’를 촉진하는 데 일조했다. 좌우 진영에 속해야 유의미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현 정치 지형 탓에, 각 정당과 정당의 지지자들은 양극화되는 경향을 보여왔다. ‘서초동vs광화문’ 집회와 ‘태극기부대’ ‘개딸’이 바로 그 증거다. 양극화는 혐오와 불신으로 이어졌고, 그 결말은 대화와 토론의 실종, 타협의 증발이었다. 이에 따라 국회에서 우위를 점한 정당은, 확보된 4년 동안 진영 논리에 따른 이권 배분에 박차를 가했다. 어차피 상대를 설득할 시간도 재간도 없었기 때문이다. 국민 전체의 이익을 위해 일해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고 스스로 정체성을 저버렸다. 도리어 우리 사회 자원 배분을 결정짓는 헌정적 절차를 악용해 ‘국민의 대표’란 말 자체를 기만으로 만들었다.


문제는 정치권의 팬덤에 대한 자발적 방임이 성숙한 민주주의의 발판인 ‘풀뿌리 민주주의’를 오염시켰다는 것이다. 정치적 팬덤의 시작은 2000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팬클럽인 ‘노사모’의 등장이었는데, 시민 사회운동의 일환으로 각종 개혁 운동과 관련 활동을 이끌며 ‘풀뿌리 민주주의’에 기여했다는 평가도 존재했다. 하지만 오늘날엔 이 능동적 시민의 역할이 사방에 포진한 잠재적 ‘적’으로부터 정치인을 수호하는 친위대의 역할로 퇴행했다. 정치인들은 이 사실을 알고도, 문제 삼기보다 정략적인 판단에 따라 풀뿌리 ’친위대’ 양산을 그저 방관했다. 어차피 국민 모두로부터 지지를 얻을 수 없는 양당 정치의 공식에서, 당선에 충분한 표만 확보하면 문제없기 때문이다. 한 표만 더 받아도 당선이 되는 소선거구제가 의원들의 ‘도덕적 해이’를 부추겼다. 선거제도 개편이 시급한 이유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개정해 원내 구성을 실질적인 다당제로 바꿔야 한다. 정의당, 기본소득당 등 이미 원내에 진출해 있는 소수정당이 있다. 하지만 ‘큰 목소리’를 내기엔 턱 없다. 부동층이 30퍼센트에 육박하는 우리 국민의 정치 성향을 미루어 볼 때, 다양한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소수 정당에 표를 줄 공산도 작지 않다. 좌우 진영에 따라 정치 의제에 대한 입장을 결정하던 과거와 달리, 젊은 유권자들은 젠더, 기후, 지속가능한 경제 등 더 다양한 이슈에 관심이 많다. 비례대표제가 실질적으로 다양한 민의를 반영하도록 개편된다면 성숙한 민주주의를 희생시켜 표몰이에 매진하던 구태를 부술 수 있다.


2020 총선을 앞두고 개정한 비례대표제는 거대 양당의 ‘위성 정당’ 꼼수로 그 취지가 퇴색됐다. 새로운 선거제도 개혁은 달라야 한다. 이탈리아의 정치이론가 마키아벨리는 “모든 가혹행위는 한 번에 끝내야 한다. 그래야만 덜 고통스럽고 반감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했다. 오랜 정치 지형을 바꾸는 일에는 진통이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가혹한 개혁이라도 결단해야 한다. 당파 싸움과 특정 정치인 스캔들에 매몰된 ‘저질 정치’로 민주주의가 소모될 때, 국민들은 조용히 정치를 외면한다. 건강한 민주주의는 다수의 시민의 관심과 참여에 달렸다. 팬덤이 물러가야 국민이 온다. 변화의 시작은 선거부터다.


조선 저널리즘 아카데미 1기

김예랑